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문단 편집) === 제1차 삼두정치 ===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당시 반 [[술라]]파의 아이콘쯤 되는 사람으로, 여러 가지 말이 있을 순 있겠지만 일단 친 원로원파였던 [[술라|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항명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사람이었고, 키케로를 제외하고는 가장 빠르게 '명예로운 경력'을 밟고 있던 유망주였다. 그렇게 카이사르는 알게 모르게 정치적인 업적을 조금씩 쌓아왔고, 사실 동료 정치가들 중에선 매우 성공적인 편이였다.[* 당시 카이사르보다 빠르게 출세한 인물은 사촌인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키케로, ~~불법덩어리~~ 폼페이우스 외에는 없다.] 그는 안찰관을 맡으면서 거대한 규모의 서커스와 검투 경기를 개최하여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으며 법무관의 자격으로 총독으로 부임해선 지금의 포르투갈 지역에 해당되는 곳을 군사를 이끌고 제패하기까지 한다. 훗날 갈리아 지역을 제패한 것을 보면 야만족을 제패하는 솜씨는 아마도 타고난 듯. 참고로 카이사르가 제패한 갈리아 지역은 이탈리아 반도보다 더 넓다. 또한 30대의 나이에 이미 종교 최고 지도자인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었다. 중대한 실권은 없으나 그래도 명함에 찔러넣기에 이보다 근사한 것은 없었는데, 이것은 종교의 최고 책임자라는 타이틀의 무게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권이 아주 없다고 하는 건 오해인게, 로마는 의외로 미신과 전통을 매우 중요시하였고, 정치에도 그런 미신적인 요소들이 합법적으로 적용됐다. 카이사르는 최고 사제직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반대파들이 후에 불길한 징조 드립을 쳐가면서 태업하는 것도 '종교 지도자'로써 죄다 씹어버릴 수 있었다. 게다가 기원전 200년경부터 영향력 있던 집정관들은 대부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겸임했다. 괜히 카이사르가 폰티펙스 막시무스 선거에서 지면 죽어버리겠다고 언급한게 아니다. 하지만 이런 출세가도를 달리면서도 카이사르 뿐 아니라 동시대의 인물들은 전혀 카이사르의 출세가 빠르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폼페이우스는 둘째치고 카이사르는 정상적으로, 술라가 정한 법에 따라서 제대로 '명예로운 경력'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폼페이우스는 그 출세에 불법, 탈법이 꽤 많았다. 나이도 문제지만 단독 집정관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집정관 출마할 때는 나이가 벌써 40이 다 되어있었다. 어찌 되었건 카이사르는 [[옵티마테스]](Optimates)라 불리는 원로원 기득권 파가 득세하는 원로원 내에서 민중파([[포풀라레스]], "Populares") 출신이었다는 핸디캡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의 총독 임기가 끝난 뒤 귀국하여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나 원로원의 강한 견제를 받아 당선이 불확실하였다. 이 위기를 해결하고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하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전과를 안고 로마 장군이 한 번 해도 영광이라는 개선식을 세 번이나 했지만, 자기 휘하 병사들에게 제대로 봉토 한 번 지급해주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원인은 역시나 당시 [[국회의원|막장]]이었던 로마 원로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연합은 서로에게 이득이었는데 카이사르는 집정관 선거와 그 이후의 정치활동에서 폼페이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확실한 표와 무력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그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집정관을 원로원 내에 두게 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당시 상공업과 중산층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크라수스를 끌어들임으로써 이들 계급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다.[* 참고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술라 밑에서 군대에 종군하고 법에 따라 제대로 명예로운 경력을 쌓았다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사적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아예 삼두정치 초반에는 비교적 '애송이'였던 카이사르를 메신저로 시켰을뿐 정작 둘이 단독으로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크라수스가 이 두 연합에 끼어든 과정을 살펴본다면 당시 로마는 세금을 정부가 거두는 것이 아닌 [[징세청부업자]]에게 맡겼다. 이들 징세업자들은[* 사실상 징세 '''기업'''에 가까웠다.] 로마 정부에게 그들이 거둘 수 있는 세금의 최대 양을 제시하였고 이들 중 가장 높은 징수액을 제시한 징세업자를 로마 정부가 지정하게 된다. 그러면 그 징세업자는 이 액수를 알아서 징수한 뒤 로마 정부에게 납부하고 나머지는 그들이 먹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런 징세업자들은 당연히 이미지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당장 천 년 이상 지난 후 천재 과학자였던 라부아지에가 프랑스 혁명 정부에 처형당했는데 그 이유는 라부아지에가 악명높은 징세청부업자이기도 했기 때문으로 이렇듯 징세청부업자는 민중의 적이었고 성경에서는 천국에 가기 어려운 직업으로 창녀와 투탑이라고 여겨졌을 정도였다.] 그런데 삼두정치가 구성될 때 이 동방의 징수를 낙찰받은 징세업자들은 동방의 경제가 워낙 안좋아 도저히 로마 정부에게 제시한 양을 납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로마 원로원에게 좀 할인해 달라고 통사정하였는데 로마 원로원은 매우 완강하게 이것을 거부하였다.[* 완강하게 거부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 카토|소(小) 카토]].] 크라수스는 이 일에 상당히 깊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두 정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가담한 것이었다. 이들은 여기에 키케로를 가담시키려고 유혹하였는데 이는 키케로는 당시 로마의 대표적인 석학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케로는 이것을 야합이라고 생각하여 가담을 거부한다. 이렇게 삼두정치가 형성되자 카이사르의 집정관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당시 로마의 풍조는 카이사르와 비슷할 정도로 빚을 진 젋은 정치가가 수두룩했다. 가령 카틸리나의 음모를 주도한 카틸리나도 카이사르와 비슷한 규모의 빚을 지고 있었으며 훗날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활약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도 카이사르보다 더 젋은 나이에 카이사르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이는 당시 로마의 선거가 돈질로 승부가 나는 경향이 횡행했기 때문이며[* 물론 당시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금권선거|뇌물로 유권자 매수하는 것]]은 불법도 아니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때문에 야심찬데다 유망한 젊은이들이 빚더미에 허덕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카틸리나가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것도 그가 집정관 선거에서 두 번씩이나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키케로가 그를 탄핵할 때 시정잡배처럼 묘사하나 실은 꽤나 능력있는 인물이었으며 실제로도 매우 아슬아슬하게 집정관 선거에서 3등으로 탈락하였다.[* 집정관 선거는 대략 10명 정도가 경쟁한다. 3등이면 매우 유력한 후보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로써 빚으로 유지한 그의 출세길이 파탄이 난 것이었다.[* 거기다 키케로는 민중파였던 카틸리나를 눈엣가시로 여겨서 일부러 선거일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 로마 외 라틴 도시에서 선거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헛수고를 하게 되므로 이들의 표는 전부 나가리가 되는데 이런 로마 외 라틴 도시들은 대부분 민중파를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키케로가 카틸리나에게 거하게 엿을 먹인 셈이다.] 이는 카이사르도 마찬가지라, 그가 최고제사장 선거에 나섰을 때 선거에서 지면 집에 돌아오지 않겠노라라고 말했던 것은 낙선은 곧 정치적 종말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당시 로마 정치인들의 상황은 빚더미에 앉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카이사르가 특별하게 취급받아 채권자가 돈셔틀이 되는 상황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이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라는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당대에 그보다 더 잘나간 인물은 드물다.[* 카이사르는 당시 빠른 속도로 출세한 것으로 여겨진 키케로보다 각각 2년씩 빨리 공직에 선출된다. [[키케로]] 항목 참고.] 여기에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에게 빌려준 돈은 크라수스 재산의 일부에 불과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최고 제사장에 오른 전도 유망한 젊은이였으며 크라수스에게 카이사르는 돈을 얼마를 빌려가든 여전히 쓸만한 말이었다. 즉 크라수스와 카이사르는 어느 일방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과 자금을 주고 받는 '''공생 관계'''였다.[* 물론 이 때 카틸리나를 변호하다가 좆망 직전까지 몰릴 뻔한 카이사르를 끝까지 후원한 크라수스도 어느정도 그에게 우호적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군사적 경험을 아들에게 쌓게할 목적으로 보낸 것이긴 하지만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아들을 보내 종군케 했고 카이사르도 후원자의 아들이 가진 재능을 총애하여 '젊은 크라수스', '청년 크라수스'로 부르며 총애했다고 한다.] 원래부터 인기가 많았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지지까지 받자 어렵지 않게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에게 토지를 주기 위한 법안을 내놓았다. 이때 폼페이우스는 전직 집정관으로 크라수스랑 원로원에서 이 농지법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고, 민회에서는 자신들의 퇴역병들을 동원하여 표를 싹쓸이하면서 농지법을 통과시킨다.[* 왜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집정관일 때 이 농지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나 의아해할 수 있으나, 일단 같은해 집정관이었던 크라수스와 사이가 나빴고, 둘째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등에 비해서 정치감각이 떨어졌던 데다가, 셋째 카이사르나 키케로같은 달변가가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가 법안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면 나랑 토론해보자는 카이사르에 반박을 못한 카토가 [[필리버스터|장광설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면서]] 카이사르가 [[릭토르]]들을 시켜 카토를 밖으로 끌어내리는 소동이 벌어졌으며, 민회에서는 동료 집정관인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가 역시 토론해보자는 카이사르를 씹고 매수한 호민관들과 함께 거부권을 행사하려다가 폼페이우스의 퇴직병들과 민중들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나기까지 한다. 그 이후 비불루스는 폼페이우스의 정치깡패들 때문에 사실상 정치적으로 거세되었고, 그마저도 카이사르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소문이 돌아[* 카이사르가 소문을 조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어차피 그게 아니더라도 폼페이우스 휘하 퇴역병들한테 농지법과 관련해서 단단히 찍혔으니 대낮에 돌아다니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집정관 직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카이사르가 모든 직을 수행하였다.[* 여기서 비불루스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게 부당하게 당한 선량한 피해자라고 오해할 수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는 공화정 말기라 이런저런 개혁이 필요했는데, 특히 이 농지법같은 경우 너무 오래 질질 끌어서 폼페이우스 무산자 계급 퇴역병들이 로마 시내의 부랑아들 내지 정치깡패로 전락한 상황에서 원로원파의 지지를 업은 비불루스는 단순히 카이사르가 집정관일 때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겠다며 올해에는 아무런 개혁도 없을 것이라고 천명한 상태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카이사르가 직접 이 농지법에 대해서 토론해보자는 말조차 씹어버렸다. 즉, 이 작자가 집정관 임기 내내 한 일이라고는 일하겠다는 다른 집정관 발목을 잡은 것과(앞서도 말했듯이 이 작자는 난 일은 안 하고 카이사르의 발목만 잡겠다고 선언까지 해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민중으로부터 보복당할 것을 우려해서 집 안에 숨어 지낸 것밖에 없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해당되는 연도를 집정관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따라서 원래 그 해당되는 연도를 비불루스와 카이사르의 해라고 불러야 했는데 로마 시민들은 비불루스가 아무런 영향력을 못갖게 된 것을 풍자하여 율리우스와 카이사르의 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약조였던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해주는 문제와 징세업자들의 세금 계약 문제를 해결한 뒤 자신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부임한 뒤 수도에 남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 대해 원로원은 이간질을 하였고 이것이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다. 애초에 앙숙이었던 둘은 원로원이 조금만 손을 써주자 금세 동방 속주의 지배권을 놓고 서로를 격렬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걸 눈치챈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중 겨울철에 이탈리아로 내려와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회담을 가지고, 두 사람에게 공동으로 집정관에 출마할 것을 제의한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에게 동방 대신 스페인의 총독 직위를 제시하면서 불안한 삼두관계를 다시 묶는데 성공했다([[루카 회담]]). 하지만 갈리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는 카이사르의 인기는 사실상 폼페이우스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명망이 높아지고 있었다. 따라서 지지 기반인 민중의 지지와 군대의 지지 둘 다 밀려가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당장 내칠 만큼 잘나간 건 아니었지만, 7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사실상 갈리아를 평정한 카이사르가 그야말로 혁명적인 전과를 올리면서 모두를 놀라게 한 건 사실이다. 분파는 조금 다르지만 갈리아의 켈트족들은 여러 번 로마의 국운을 위협한, 아주 강대한 세력이었다. 물론 카이사르 때 되면 갈리아의 양대 부족인 하이두이와 아르베르니가 싸우다가 둘 다 큰 피해를 입고 그 전까지 듣보잡 취급하던 수에비족에게 공물을 바치는 등, 둘 다 궤멸 직전까지 간 상황이긴 했지만 여전히 무시못할 세력이었다.][* 중요한 것은 애시당초 삼두정치 초반에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사이를 조정하는 역할이었던 카이사르가 이제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갈리아 원정을 성공시켜서 군공 면에서는 폼페이우스에게도 꿇리지 않았고 또한 크라수스의 돈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문제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에 자극을 받아[* 카이사르는 원래 크라수스의 후원을 받는 파트로누스(후원자) - 클리엔테스(피후원자) 관계였다.] 크라수스도 군사적 업적을 쌓으려고 무리수를 두고 만다.[* 크라수스는 재산은 많았지만 로마 정치가에게 가장 중요한 군사적 업적이 고작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진압이었을 정도로 상당히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다른 두 삼두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다.] 바로 '''[[파르티아]]''' 원정. 애초에 크라수스가 시리아 따위의 부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지만, 훗날 크라수스보다 군사적 재능이 훨씬 뛰어났던 안토니우스마저 나중에 실패하고 만 원정길을 군재가 빈약한 크라수스가 성공할 리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래도 병력은 제대로 건져서 돌아왔지만 크라수스의 원정은 재앙 그 자체였다.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은 궤멸당했고 크라수스도 전사했다. 삼두정치의 한 축이 무너지게 된 크라수스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폼페이우스는 결정적으로 원로원파로 넘어간다.[* 이는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딸)|율리아]]가 세상을 떠난 탓도 컸다.] 이로써 삼두정치는 붕괴되고 두 영웅 간의 대결의 승자만이 후대의 지배자가 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